저자: 어느 한국인 사제
출판사: 성바오로 출판사, 2017
본문 중:
주님, 이곳은 당신의 집입니다. 저는 불림 받은 종일 뿐입니다. 비록 아주 작은 성당이지만, 이곳을 생각하는 모든 이들, 잠시라도 머물다 가는 모든 이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지상 나그네 길이 끝나는 시간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세상 모든 곳의 성지에서 빛을 밝히셨듯이, 희미하게나마 이곳에서도 세상을 비추는 빛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소서.
저는 일명 고해성사를 까다롭게 주기로 소문난 젊은 신부였지요. 그날도 미사 전후로 수백 명의 신자들에게 판공성사를 주느라 혼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차례대로 고해소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고백을 듣고, 고해성사의 형식을 지키지 못하거나 준비 없이 보는 사람들, 혹은 냉담의 정도나 죄의 경중에 따라 여느 때처럼 무척 엄중한 보속을 주면서 훈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형제분이 고해소에 들어와서는 성사를 어떻게 보는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흐느끼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분의 침묵과 몇 마디 말이 이어지고 또다시 침묵하기를 반복했기에, 고해성사의 원칙과 중요성에 대해 그리고 그 형제의 잘못된 자세에 대해 습관처럼 강한 훈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흰 천으로 가려진 건너편에서 흐느낌과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신부님, 저 20년 만에 성당에 나왔습니다. 그런 제가 고해소까지 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줄 아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야단을 치시면 제가 어떻게 고백을 합니까? 신부님은 죄를 짓지 않습니까?"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말문이 막혀 잠시 멍해졌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고해소 문을 열고 반대편 고해소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그 형제님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님께 깊이 고개 숙여 사과를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음 진정시키시고 다시 차분하게 하느님께 성사를 보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를 하는 동안 그 형제의 뒤편에는 수십 명의 신자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제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도 않았고, 부끄럽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은 그 형제에게 사제로서 교만했던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그 형제가 다시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진심 어린 사과와 하느님의 이끄심 때문이었을까요? 그 형제는 다시 고해소로 들어갔고, 이제는 주저함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했습니다. 고백을 듣는 내내 저는 저의 교만함을 보속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그 형제 덕분에 저는 어느 순간 죄의 항목을 찾는 심문자, 더 나아가 죄를 판단하는 심판자가 되어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어느새 그렇게 변해 버린 제 모습이 너무나 한심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예수님, 당신 마음을 실행하는 일인 사목을 하지 않고 인간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 고해소 안에서 진심으로 뉘우쳐야 할 사람은 그 형제보다는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분 덕분에 저는 제가 있어야 할 제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감상:
가톨릭에서는 사제를 호칭할 때 신부님이라고 한다. 문자대로 풀이하자면 영적인, 정신적인 아버지가 된다. 신부라는 단어보다 사제라는 단어가 사제의 역할과 기능을 더 분명하게 규정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사제들이 독선과 아집에 빠지기 쉬운 것은 자신이 영적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자신들이 무엇인가 지도하고 훈계하는 역할을 떠맡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과거에는 단지 사제라는 이유로 나이 많은 신자들이 젊은 사제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젊은 사제가 자신보다 더 나이가 많은 신자들에게 반말을 하기도 했다. 하긴 요즘에도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자매들을 "야! 야!" 라고 부르며 반말을 하는 사제들이 있다. 이런 의식은 사제를 한없이 높은 위치로, 거의 하느님의 자리 수준으로 올려 놓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로서, 벗으로서 사람들을 섬기셨다.
저자는 일단 그런 허영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다. 동일한 선상에서, 다르게 표현하자면 평등한 인간 대 인간으로 신자를 대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일상의 사건들 안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회심의 기회를 발견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회도 발견한다. 진솔한 인간으로서, 목자의 역할을 겸허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저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추락한 종교인들의 위상을 회복시켜 주며, 사제의 역할의 중요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어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가장 거룩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인간다움으로써 거룩함에 가 닿을 수 있으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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