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을 보고 이렇게 감동받기는 첨인 것 같다.
쓰레기장으로 변한 지구의 모습은 정말 처참하다. 하늘도 대기오염으로 인해 푸른 색을 잃었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쓰레기가 발에 채인다. 생명체라고는 바퀴벌레 한 마리. 그리고 로봇 하나. 로봇은 생명체라고 부르기에 좀 뭣하지만, 암튼.
700년을 혼자 살아남았다니.. 폐품 처리 로봇으로 설정되었으니, 하는 일이 폐품처리겠지만, 그 긴 기간동안 잔꾀부리지 않고 성실히 일해온 월이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바퀴벌레를 동무 삼아 쓰레기나 처리 하며 지내는 모습이 눈물겹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끝도 없는 그 일을 쉼 없이 하다니.
월이는 자기 집도 가지고 있다. 월이는 거기에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지만, 쓸만한 물건들을 많이 모아 놓았다. 라이터, 전구, 비디오 테입 스푼과 포크, 뽁뽁이, 큐브..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월이의 보물창고는 작가의 유머를 엿보게 한다. 그리고 월이의 재치도 함께. 하루는 둥그런 자동차 바퀴 같은 것을 집어 가길래 그것으로 무얼 하나 보았더니, 비디오 화면 속에서 춤추던 남자들의 모자로 대용하려는 것이었다. 인간들의 삶을 닮아가는 로봇, 재미있는 현상이 아닌가?
몸이 고장나면 스스로 애프터 서비스도 한다. 그러기 위해 마련해 둔 부품들도 많다. 아마도 망가진 동료들에게서 가져온 것이리라. 7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안망가질 기계가 어디 있겠는가. 월이는 스스로 고치는 능력이 있기에 살아 남은 것일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월이는 로봇 중에서도 똑똑한 로봇인 것 같다. 생기기는 깡통처럼 생겼지만, 깜빡이는 눈, 재빠른 움직임. 바퀴벌레를 아끼는 마음... 어디를 봐도 매력적이다.
어느 날 비행선이 지구를 찾아와 로봇 하나를 내려놓고 간다. 지구를 탐사하라는 임무를 띤 이브라는 로봇이다. 하필 이름이 이브일까. 창세기의 이브랑 이름이 똑같네. 그녀로 인하여 인간이 지구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서인가? 그래서 제 2의 창세기가 시작된다는 암시일까?
월이는 이브를 보자마자 반한다. 이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이것 저것 구경시켜준다. 그러다가 자그마한 식물을 보여주는데, 식물을 보자마자 이브는 꼼짝 안한다.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그런 것 같다. 걱정이 된 월이는 어떻게 하든 이브를 다시 살리려고 애를 쓰는데, 사실 죽은 게 아니지만 월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아니면 심각하게 고장난 것으로 본 것 같다. 이브의 몸에 각색의 꼬마전구를 둘러준다든가, 벼락을 맞으면서도 계속 우산을 씌워주는 모습은 너무나 애잔하다.
비행선이 다시 나타나 이브를 데려가려 하자 월이도 비행선에 매달려 결사적으로 따라간다. 인간들이 다 어디로 갔나 했더니 거기에, 거대한 비행선 위에 모여 있다. 활동을 하도 안해서 턱도 없고 배불뚝이에다 숏다리다. 제 몸을 추스리지도 못한다. 편함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차저차 하여 비행선의 선장은 지구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결정하게 만든 데는 월이와 이브의 역할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몇몇 선한 불량로봇들의 협조도 있다.
인간들은 생각도 부족하고, 판단력도 부족하다. 모든 시스템이 자동으로 돌아가므로 생각이라는 걸 할 필요가 없어서 퇴화된 것 같다. 사람은 로봇처럼 보이며, 로봇이 오히려 더 사람답게 보인다. 현실적으로 아직은 고지능의 로봇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만일 만들어진다면 인간보다 똑똑할 가능성이 크다. 더 많은 정보를 토대로 판단력 면에서도 인간을 추월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로봇의 지배를 받게 되지 않을까. 로봇을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미래의 언젠가 정말로 이 영화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맞게 되지 않을지 걱정된다.
월이는 어떻게 하다 감정이 생겼을까? 처음부터 감정이 있는 로봇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진화한 것인지? 이브는 700년 후에 업데이트된 디지털 로봇이니 감정도 설정되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월이의 사랑은 참으로 신기하다. 사랑하고 슬퍼하는 감정 이외의 다른 감정, 예를 들면 증오, 분노, 폭력, 복수심 같은 부정적 감정이 안보이니 다행이다.
이브는 지구에 돌아오자 불타버린 월이의 칩을 다른 칩으로 갈아끼워 준다. 덕분에 월이가 살아나긴 했지만, 이브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른 로봇에 사용되던 칩을 갈아넣어 주었으니, 다른 로봇이 된 거나 마찬가지일 게다. 하지만 이브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마침내 월이는 이브를 기억하게 된다. 이것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천만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사랑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데, 오히려 로봇의 사랑이 더 순수한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무언가 근질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영화라는 데 이의가 없다. 월이와 이브가 지구로 돌아와 영원히 사랑하기를 바란다.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0) | 2008.09.11 |
---|---|
러브 어페어(Love Affair) (0) | 2008.09.09 |
나의 왼발 (0) | 2008.08.12 |
타인의 삶 (0) | 2008.08.05 |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Music and Lyrics) (0) | 2008.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