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버나움은 레바논 영화감독 나딘 라비키의 작품으로서, 레바논 난민들의 자녀들이 겪는 처참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는데, 영화 상영 후 15분 동안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또한 여러 유수 영화제에서 8차례의 관객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 자인이 초췌한 모습으로 검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재판을 하려면 원고의 나이를 알아야 하는데, 자인의 나이를 알 수 없어서, 의사에게 치아 상태를 검사받으려는 것이다. 자인은 유치가 전부 빠져나간 것으로 보아 12세 정도로 추정된다.
재판의 원고는 자인이고, 피고는 그의 부모이다. 자인이 자기를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소한 것이다.
자인의 말을 들어보자.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해요. ... 욕먹고, 얻어맞고, 발길질 당하고, 사슬이나 호스나 허리띠로 맞고, 꺼져 개새끼야. 쌍놈의 새끼야... 사는게 개똥 같아요. 내 신발보다 더러워요. 지옥같은 삶이에요. 통닭처럼 불속에서 구어지고 있어요.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은 그것을 바라지 않아요. 우리가 바닥에서 짓밟히길 바라죠. 뱃속의 아기도 나처럼 될 거에요. ... 부모에게 바라는 것, 애를 그만 낳게 해 주세요."
자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모를 고소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서 자인이 말하는 것처럼 살게 될 것을 알고 있다면 태어나고 싶은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인의 부모는 몇 명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많은 자녀를 두고 있다. 자인의 부모가 일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일을 시켜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사는 것 같다. 그 일이란 물에 트라마돌이라는 약을 타고 과즙을 약간 넣어 만든 쥬스를 사람들에게 파는 것이다. 쥬스가 그런대로 잘 팔리는 것을 보면, 트라마돌의 어떤 성분이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것 같다. 장사를 할 때 어린 동생을 안고 엎고 파는 것을 보면, 부모는 아이들이 일하는 동안 어린 동생들을 맡아 돌보는 일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자인의 부모는 자기들은 손끝까딱 하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앵벌이를 시켜 먹고 사는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이 많을수록 돈을 벌어올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니, 아이들을 많이 낳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자인에게는 사하르라는 여동생이 있다. 열한 살 남짓 된 것 같다. 사하르가 초경을 한 것을 알게 된 자인은 사하르더러 엄마에게 그 사실을 들키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그리고 화장실로 데려가 그 흔적을 씻어 주며, 자신의 티셔츠를 벗어 생리대로 사용하게 한다. 그리고 사하르와 집에서 도망을 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사하르는 부모의 강요에 의해 울며불며 억지로 아사드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아사드는 나름 그 동네 유지이며, 자인 가족이 세든 집의 주인이기도 하다. 부모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지만, 실은 집에서 쫒겨날까봐 두려웠으며, 아사드가 사하르를 데려가는 댓가로 주는 금전적 이득을 계산한 것이다. 이는 인신매매로서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화를 내며 문짝에다 분풀이를 하던 자인은 엄마에게 얻어맞고 쫒겨난다. 이리저리 떠돌다 이디오피아 난민 티게스트를 만나고, 티게스트의 어린 아들 요나스를 돌보아주며 함께 산다. 자인은 요나스와 형제처럼 지낸다. 자인의 연기력도 대단하지만, 돐 정도 된 요나스의 연기는 감탄스러울 정도이다. 리듬이나 음악이 들리면 바로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그리고 사람들의 어떤 행동이나 몸짓에 반드시 반응을 보인다. 너무나 사랑스럽다.
티게스트가 불법체류자로 체포되어 집에 돌아오지 못하자 자인은 어떻게든 요나스를 버리지 않고 함께 살려고 애를 쓴다. 요나스에게 먹일 우유가 없어 다른 아이가 먹고 있는 우유를 빼앗아 오는가 하면,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자 얼음에 설탕을 뿌려 빨아먹게 한다. 자인의 노력이 참으로 눈물겹고 가상하다. 자인의 부모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책임감과 성실성을 보여준다.
자인은 해외로 나갈 꿈을 꾸며 자신의 출생관련 서류를 찾기 위해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동생 사하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하르는 임신중 하혈을 하여 병원을 찾았는데, 난민이라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당하고 병원 문턱에서 죽는다. 분노한 자인은 아사드를 찾아가 칼로 찌른다. 그리고 소년 교도소에 갇힌다.
자인의 엄마가 교도소로 면회를 와서 말한다. "왜 엄마에게 화를 내느냐? 나도 딸을 잃은 엄마다. 신은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돌려주신단다. 동생(사하르) 일은 나도 마음이 아프다. 너의 동생을 임신하고 있다. 딸이면 좋겠다. 사하르라고 이름 짓게.. "
자인은 대답한다. "엄마 말이 칼처럼 심장을 찌르네요. 엄만 감정이 없나보네요."
재판정에서 자인의 아버지가 하는 변도 들어보자. "딸의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 결혼하면 적어도 침대에서 잘 수 있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침대에서. 담요도 덮고 밥도 먹고... 이게 전부 다 우리 잘못인 겁니까? 저도 이렇게 나서 자랐을 뿐이에요. 저도 부모 잘 만났으면 이렇게 안 살았어요! ... 전 등골만 휘고 마음고생만 했습니다. 가정을 꾸린 게 후회스럽습니다. 제 인생을 망쳤으니까요."
아버지가 하는 말은 한마디로 단정짓기 어려운 문제들이며, 우리도 삶에서 맞고 있는 문제들이다. 그렇지만 그가 등골이 휘고 마음고생 했다는 말은 공감되지 않는다. 그는 무책임했고, 아이들을 방치했으며, 아이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았다.
자인의 엄마는 신이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돌려준다고 말하는데, 구약에서도 탈무드에서도 읽어보지 못한 말이다. 이런 듣보잡의 논리를 신의 이름을 빌려 사용하는데, 신이 들으면 억울할 것 같다. 엄마가 이렇게 자기 멋대로 신을 이용하니, 자인도 신이 자신들이 바닥에서 짓밟히길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뿌리박혀 있다. (사실 신도 바닥에서 짓밟혔으며, 매질을 당했고, 죽음까지 당했다. 그러나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원하여 우리 대신 고통과 수난을 당한 것이 아닌가.)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쉽게 상황이나 남이나 신을 탓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책임함을 드러낼 뿐이다.
자인이 사용하는 욕은 하나도 상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으며, 적절하고 절묘하며 통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도 가보지 못한 자인이 정상적인 표현 방법을 어디서 배울 수 있었겠는가.
감독은 극심한 빈곤과 부당한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비참상을 어둡게만 그리지 않았다. 영화는 고통과 비참상만 부각하지 않는다. 미소를 짓게 하는 장면들도 있고, 미안하긴 하지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장면들도 있고(어떤 장면들은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훈훈한 에피소드도 있고, 꿈도 담겨 있다. 감독이 섬세한 시각으로 연출한 장면들을 한 컷씩 따로 편집해 내더라도 매 컷이 포토상을 받을 만하다고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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