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영화인데, 핀란드 영화는 처음이라 관심있게 보았다.
주인공 야곱 신부는 아마도 은퇴한 신부 같다. 시골의 조용하고 낡은 사제관에 살면서 배달되어 온 편지들을 읽고, 답장해 주고, 편지를 보내어 온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일을 한다.
누군가의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누군가의 기도를 절실히 원하는 사람도 있다. 주위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특히 그렇다.
나는 몇 년 전에 네이버 블로그에서 그런 고통스런 외침을 본 적이 있다. 암으로 고통받고 있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얼굴 사진도 올려져 있었다. 그 젊은이는 누구라도 좋으니 저를 위해 기도좀 해 주세요! 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오죽 부탁할 곳이 없었으면 블로그에 그런 글을 올렸을까.
나도 살면서 도움을 청하거나 무언가를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런 편견 없이 그냥 내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주변에 가족들이랑 친구들이랑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들에게 내 마음을 다 털어놓는 일을 막는 무엇인가가 있다.
만일 야곱 신부같은 분을 알고 있다면 나도 그분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청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 같다. 늙고 눈도 안 보이는 보잘것 없어 보이는 야곱 신부가 편지 내용을 듣고, 마음을 집중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고귀한 일을 하고 있는 고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한 구석에 갇혀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의미있는 존재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삶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떠올랐다.
그런데 눈먼 야곱 신부의 편지를 읽어주라는 임무를 띠고 종신형에서 사면을 받고, 야곱 신부에게 보내진 레일라는 야곱 신부의 일을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이 귀찮아진 레일라는 야곱 신부에게 온 편지를 조금만 남겨 두고 나머지 편지들을 우물 속에 던져 버린다. 그러다 보니 자연 편지들이 끊기게 되고, 야곱 신부는 실의에 빠진다. 그러면서 편지를 읽고 답장해 주고 기도해 주는 일이 하느님이 자신에게 맡긴 사명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이어가기 위한 방편을 주신 것이었다고 자책한다.
이 부분은 참으로 예민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고 있던 일이 어느 날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던 바닥이 무너진 것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편지가 끊긴 이후 야곱 신부는 있지도 않은 결혼식 주례라든가 세례식과 같은 엉뚱한 일을 벌이며, 사제라는 자신의 신분을 되새기려 한다. 어찌 보면 망상에 걸린 환자처럼 딱해 보인다.
사제관을 떠날 결심을 한 레일라는 택시를 부르는데, 기사가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데 답을 못한다. 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택시에서 내리고, 택시를 돌려보낸다.
레일라는 야곱 신부의 실망을 본 뒤로는 야곱 신부에게 오지도 않은 편지를 마치 온 것처럼 편지 내용을 지어내어 읽어준다. 그러다가 무슨 마음인지,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를 읽는 양 털어놓는다. 엄마로부터 대신 매를 맞아준 언니, 언니가 결혼하여 형부에게 매를 맞는 이야기, 그걸 보고 분노하여 형부를 칼로 찔러 죽인 이야기를...
야곱 신부는 그 이야기가 레일라의 이야기라는 걸 알아차린다. 레일라는 야곱 신부에게 누가 자신을 용서하겠느냐고 묻는다. 야곱 신부는 사람이 못하는 일을 하느님은 하신다고 답하면서, 레일라의 언니 리사가 자신에게 보내온 편지들을 보여준다. 그 편지들에는 동생 레일라에 대한 언니 리사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 레일라는 언니의 사랑을, 언니의 용서를 야곱 신부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묘한 건, 이 장엄한 순간, 야곱 신부가 늘 입고 있던 사제복이 아니라 속옷 차림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속옷을 입고 있어도 사제인 건 분명한 일이지만, 사제의 신분이 레일라를 구원했다기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일을 했다고 감독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주요 등장 인물이라곤 야곱 신부, 레일라, 우편배달부 세 사람뿐이다. 연극으로 만들었어도 충분히 이야기가 전달될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핀란드의 풍성한 자연과 외딴 사제관의 풍경, 배달부가 편지를 전해 주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오는 길목, 야곱 신부와 레일라의 세심한 표정들과 같은 영화적인 요소들이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든 것 같다. 단순한 줄거리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과 마음을 건드리는 감동적인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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