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랑 놀자

이덕일저
김영사
2004년 5월 1일 초판 1쇄 발행
2004년 5월 18일 초판 3쇄 발행


정재원 (1730-92)
정약용 형제의 부친. 영조 38년(1762) 생원시에 급제했고, 대과는 보지 않았으나 음보로 지방관에 나가 진주목사로 있던 중 사망했다. 첫 부인 남씨가 장남 약현을, 후취 윤씨가 약전, 약종, 약용과 이승훈의 부인이 된 딸을 낳았다.

정약현(1751-1821)
정약용의 이복 맏형으로 정조 19년(1795)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자신은 천주교도가 아니었으나 첫 부인이 이벽의 누이였으며, 딸 명련은 황사영과 혼인한 관계로 고초를 겪었다.

정약전(1758-1816)
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정조 14년(1790)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정조 사후 흑산도에 유배되어 '자선어보' '논어난(論語難)' 등의 저술을 남겼다.

정약종(1760-1801)
정약용의 막내 형으로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나 다른 양반들이 천주교를 버릴 때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정조 사후 국문을 받고 참수당했다.

이승훈(1756-1801)
정조 7년(1783) 말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 가서 서양인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이듬해 돌아옴으로써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수용한다. 이때 그가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은 여러 차례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약용 형제의 매형이기도 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사형당했다.

이가환(1742-1801)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당대 제일의 천재 학자로 정조와 서양의 고학문명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채제공 사후 남인 영수가 되었으나 천주교도라는 공격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천주교를 버렸음을 언행으로 입증했으나 신유박해 때 사형당했다. 저서로 '금대관집(錦帶館集)'이 있다.

이벽(1754-85)
정약현의 처남으로 정약용에게 처음으로 천주교를 가르쳐 주었다. 박식했으나 천주교를 접한 후 벼슬을 포기했다. 문중으로부터 강한 배교 압력을 받아오다가 병사했는데, 일각에는 독살설도 있다.

채제공(1720-99)
정조 때의 남인 영수로 좌의정을 지냈다. 정조 때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했다가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죽고 나서 남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홍화보(1726-91)
정약용의 장인. 영조 47년(1771) 훈련초관으로 국자시에 1등했으며 무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동부승지에 발탁되기도 했다. 정조 15년(1791)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사망했다.

정학연(1783-1859)
정약용의 맏아들로 시문과 의술에 밝았다. '종축회통'이란 저서가 있다.

정햑유(1786-1855)
정약용의 둘째 아들로 '농가월령가'의 작자이기도 하다.

정학초(1791-1807)
정약전의 아들로 학문에 뛰어나 정약용이 학문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17세에 요절했다.

목만중
남인으로 정약용 집안과 가까웠으나 천주교에 반대해 벽파로 돌아서면서 정적이 된다. 정약용을 죽이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했다.

서용보(1757-1824)
노론 벽파로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들을 공격한다. 영조 때 대사헌을 지냈으며 순조 때 우의정으로서 신해박해를 주도하면서 정약용의 석방을 방해했다. 1819년에는 영의정에 오른다.

심환지(1730-1802)
영조 47년(1771)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온 이후 정조 때 벽파의 영수가 된다. 정조 사후 영의정을 맡아 신유박해를 주도했다.

혜장(1772-1811)
젊어서 대둔사의 주지가 되었다. '주역'을 공부하다가 정약용을 만난 후 다산을 사실상 스승으로 삼았다. 그가 일찍 죽자 정약용이 '아암장공탑명'을 써주었다.

황사영(1775-1801)
서울 출신으로 정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한다. 정조 14년(1790) 사미시에 급제한 후 정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전교에만 전념한다. 은둔지 배론에서 신유박해의 전말을 담은 백서를 작성해 베이징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발각되어 능지처사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노비가 되어 귀양갔으며 그의 집에는 우물이 만들어졌다.

주문모(1752-1801)
중국 장쑤성 쑤저우 출신으로 베이징 신학교 졸업 후 정조 18년(1794) 지황등의 안내로 입국했다. 이후 7년 동안 숨어 다니면서 천주교를 전파했는데, 신유박해 때 국경 부근까지 도망갔다가되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했다. 1801년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최필공(1745-1801)
궁중 전의 집안에서 태어난 중인으로 배교를 거부해 사형당할 뻔했으나 정조의 배려로 목숨을 건졌다. 정조가 평안도 심약관(審藥官)으로 임명했으나 다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최인길(1765-1795)
중국어 역관 출신으로 주문모의 거처를 마련했으며 정조 19년(1795) 주문모를 체포하러 오자 주문모 행세를 하다가 포도청에 잡혀가 장살 당했다.

권철신(1736-1801)
이익의 학통을 이었는데 많은 제자들이 따라서 녹암계를 형성했다. 양명학과 천주교를 수용하는 등 열린 가슴을 갖고 있었고, 정조 때 천주교를 버렸다고 주장했으나 1801년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옥사했으며, 시신은 이가환과 함께 기시되었다.

권일신(1751-1791)
권철신의 아우이자 안정복의 사위이다. 양명학을 연구하다가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 입교하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진산사건 때에 체포되자 80세 노모로 인해 마음이 흔들려 회오문을 지어 올렸는데, 유배 도중 고문에 의한 상처로 객사하였다.

최창현(1754-1801)
서울 출신으로 중인 역관이다.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1791년 신해옥사로 양반들이 배교하자 조선 천주교회의 주도적 인물로 활동하다 신유옥사 때 사형당했다.

정약용(1762-1836)
6울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에서 아버지 나주 정씨 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로 이복 맏형 약현과 동복형 약전 약종과동복 누이가 있다. 처음 자는 귀농이었다가 미용으로 바뀌었으며 약용은 관명이다. 호는 삼미, 다산, 사암, 자하도인, 문암일인 등이고 여유당은 당호이다. 이해에 사도세자의 변이 일어났다.

1776: 홍화보의 딸 풍산 홍씨와 결혼했고, 아버지가 복직되자 집을 세내어 서울에서 살았다.

1781: 서울에 있으면서 과시를 익혔으며, 7월에 딸을 낳았으나 닷새만에 죽었다.

1782: 서울 창동에 처음으로 집을 사서 살았다.

1783: 2월 세자 책봉을 경축하기위한 증광감시의 경의초시에 합격하고 4월 회시에 생원으로 합격해서 성균관에 들어감. 선정전에서 최초로 정조와 만남. 9월에 장남 학연이 태어났다. 정약전도 가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784: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여름에 정조에게 '중용강의'를 바쳤다. 맏형 약현의 처남 이벽에게 천주교에 대해서 처음 듣고 서적을 보았다.

1786: 7월에 둘째 아들 학유가 태어남

1789: 정월 반시에서 수석하고 곧바로 진시에 나가 급제해 비로소 벼슬길에 올랐다. 5월에 부사정, 6월에 가주서에 제수되었으며, 겨울에 정조가 한강을 건너기 위한 주교를 설치하는데 규제를 작성해 올렸다.

1791: 5월에 사간원 정언, 10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됨. 겨울에 '시경의' 8백여 조를 바쳐 임금으로부터 크게칭찬을 받았다. 이해 전라도진산에서 윤지충 권상연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천주교 배격운동이 일어나자 정약용과 약전 형제도 배교했다.

1792: 정조의 호의로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홍문관록에 뽑혔으며 이어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4월 9일 진주 임소에서 아버지 진주공의 사을 당해 공주에서 여막살이를 하면서 정조의 명으로 '수원성제'와 '기중가도설'을 지어 올렸다.

1795: 동부승지가 되고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름. 정조와 수원 현륭원에 배알했다. 이해 주문모 신부가 입국해 논란이 일었는데, 이 사건의 여파로 7월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자, 온양의 석암사에서 성호 이익의 문집을 정리했다. 12월에 용양위 부사직이 되어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해 맏형 정약현이 진사시에 합격했다.

1797: 6월에 좌부승지를 제수받았으나 자신의 천주교 관계 전말을 고백하는 사직 상소문을 올리고 물러났다. 윤 6월에도 황해도 곡산 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겨울에 '마과회통' 12권을 완성했다. 정약전은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1800: 봄에 처자를 데리고 낙향했는데, 정조가 내각 서리를 보내 곧 부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면서 나락으로 추락함. 여유당이란 당호를 지었다.

1801: 사간원의 논계로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다. 정약종과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등은 사형당하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사형에서 감해져 경상도 장기와 신지도로 유배갔다. 정약용은 장기에서 '이아술' 6권과 '기해방례변'등을 지었으나 10월 황사영사건으로 다시 체포되면서 잃어버림. 정약용과 약전은 다시 국문을 받고 전라도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갔다.

1803: 봄에 '단궁잠오' 여름에 '조전고' 겨울에 '예전상의광' 등을 짓는 등 본격적인학문에 나서는 한편 '주역'을 깊게 연구했다.

1818: '목민심서'를 지었다. 8월에 귀양이 풀려서 강진을 떠나 고향 마재에 돌아옴

1822: 회갑을 맞아 스스로 '자찬 묘지명'을 지었다. 이가환, 권철신 등 신유박해 때 사형당한 남인들의 묘지문도 짓기 시작했다.

1827: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익종)가 정약용을 등용하려 하자 윤극배가 상소해 정약용을 무함했으나 무고로 드러났다.

1836: 회혼일인 2월 22일 진시 초에 마재 자택 정침에서 조용히 서거했다.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자좌지원에 안장되었다.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 프란치스꼬의 잔 꽃송이  (0) 2012.03.30
가난한 이의 슬기 (프란치스꼬 이야기)  (0) 2012.01.24
모세의 생애  (0) 2011.01.31
열하일기 1.2.3.  (0) 2011.01.21
픽션들  (0) 2011.01.12
Posted by 몽땅연필